검은색으로 칠한 공을 보면 우리는 그것이 공이라는 사실을 쉽게 안다. 빛을 받는 쪽은 조금 밝고 반대쪽은 어둡다. 우리의 눈은 이런 밝기의 차이로 물체의 굴곡과 깊이를 읽는다.
그런데 표면에서 되돌아오는 빛을 거의 없애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밝고 어두운 차이가 희미해지면서 삼차원 물체가 평평한 검은 면처럼 보이거나, 그 자리에 깊은 구멍이 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2010년대 중반 Vantablack이 대중의 관심을 끈 이유도 단순히 검은색이 더 진해서가 아니었다. 물체의 모양을 보여주던 빛의 단서를 거의 지워버리는 표면이었기 때문이다.
그 재료에 조각가 아니시 카푸어가 관심을 가졌다. 정밀광학과 우주기술에서 출발한 초흑색이 예술의 재료가 된 순간이었다.
검은 안료 대신 작은 탄소 숲
최초의 Vantablack은 검은 페인트가 아니었다.
핵심은 탄소나노튜브였다. 탄소 원자가 아주 가느다란 관 모양으로 연결된 구조인데, 수많은 관을 표면에 세워놓으면 현미경 아래에서는 작은 숲처럼 보인다.
평평한 표면에 빛이 닿으면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바로 밖으로 튕겨 나온다. 탄소나노튜브 사이로 들어간 빛은 빠져나오기가 훨씬 어렵다. 작은 구조에 부딪혀 방향을 바꾸고, 다시 다른 구조를 만나면서 점점 흡수된다.
검은 색소를 더 많이 넣은 것이 아니라 빛이 탈출하기 어려운 길을 만든 것이다.
Surrey NanoSystems가 공개한 초기 Vantablack의 흡수율은 약 99.965%였다. 이 계열의 기술은 원래 우주·광학장비에서 원치 않는 반사광을 줄이기 위해 개발됐다. 이후 회사는 분사할 수 있는 S-VIS도 만들었지만, 일반인이 페인트통을 사서 붓으로 바르는 제품과는 달랐다. 전문적인 적용 공정이 필요한 기술이었다.1
이 표면을 물체에 적용하면 굴곡에서 돌아오는 빛까지 크게 줄어들어 형태를 읽기 어려워진다.
카푸어가 가진 것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Surrey NanoSystems는 카푸어와 협력했고, 2016년 회사 측은 그에게 Vantablack S-VIS를 창작예술 분야에서 사용할 세계 독점권을 부여했다고 밝혔다. 이 권리는 다른 산업 분야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Surrey는 이 독점 협업을 실무적인 선택으로 설명했다. Vantablack이 알려진 뒤 예술가들의 요청이 몰렸지만, 본래 엔지니어링 회사인 Surrey는 여러 예술가와 동시에 작업할 여력이 없었다. 회사는 빛과 빈 공간을 오래 다뤄온 카푸어가 기술과 잘 맞는 협업자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2
문제는 그 협업에 예술 분야의 독점권이 붙었다는 데 있었다.
인터넷에서는 이야기가 훨씬 간단해졌다.
“아니시 카푸어가 세상에서 가장 검은 검정을 독점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카푸어가 소유한 것은 검은색 자체가 아니라 특정 회사가 개발한 기술을 특정 분야에서 사용할 권리였다.
그렇다고 다른 예술가들의 불만이 단순한 오해였던 것도 아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평범한 검은 물감이 아니라 이전에는 보기 어려웠던 시각효과를 만드는 새로운 재료였다. 그런데 예술 분야에서는 그 기술에 접근할 수 없었다.
영국 작가 스튜어트 셈플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셈플은 2016년 자신이 만든 강한 형광 분홍색 안료 Pinkest Pink를 인터넷에서 판매했다.
조건이 하나 있었다. 아니시 카푸어에게는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장난과 작품의 중간쯤 되는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주문이 몰렸다. 카푸어는 Pinkest Pink를 묻힌 가운데손가락 사진으로 응수했고 논쟁은 더 커졌다.
그러자 여러 예술가가 셈플에게 이번에는 누구나 쓸 수 있는 아주 검은 페인트를 직접 만들어보라고 요구했다.
셈플은 실제로 만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야기는 다시 재료과학으로 돌아온다.
붓으로 칠하는 초흑색
아크릴 페인트에는 빛을 흡수하는 안료와 그 안료를 표면에 붙잡아두는 투명한 아크릴 수지가 들어간다.
검은 안료를 많이 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른 표면이 반짝이면 빛이 다시 눈으로 돌아온다. 아주 검은 페인트를 만들려면 빛을 많이 흡수하면서 표면의 광택도 줄여야 한다.
여기서 셈플이 흥미로운 문제에 부딪혔다.
페인트의 광택을 줄이는 데 쓰이는 재료 가운데 하나가 실리카다. 미세한 실리카 입자를 섞으면 표면에서 한 방향으로 번쩍이는 빛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실리카는 검은 안료가 아니다. 많이 넣을수록 광택은 줄지만 도막은 밝아질 수 있다.
검게 보이려고 반짝임을 없앴더니, 반짝임을 없애는 재료가 검정을 회색으로 만들었다.
BLACK 시리즈의 개발은 이 모순을 푸는 과정에서 시작됐다.
셈플은 BLACK 1.0의 검은 안료와 바탕재를 분리해 각각 1,000개의 샘플을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에게 보냈다. 돌아온 의견에는 새로운 안료와 바인더에 관한 제안이 있었고, 화장품에 쓰이던 투명한 무광 첨가제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도 포함됐다. 안료의 비율도 높였다. 그 결과가 BLACK 2.0이었다.3
BLACK 3.0에서는 접근이 더 달라졌다.
셈플은 미국의 한 연구실과 함께 아주 작은 세라믹 구형 입자 위에 검은 물질을 형성한 맞춤형 안료를 개발했다고 설명했다. 기존 안료를 사용한 뒤 첨가제로 광택을 줄이는 대신, 처음부터 반사가 적은 검은 입자를 만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안료가 좋아졌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안료를 넣으면 그것을 붙잡을 아크릴 수지도 필요하다. 셈플은 더 많은 안료와 결합할 수 있도록 바인더 역할을 하는 아크릴 고분자도 함께 설계했다고 설명했다.4
Culture Hustle은 BLACK 4.0이 자체 검은 안료, 아크릴 바인더와 무광 첨가제를 조합한 배합이라고 설명한다. 한 제품 설명에서는 가시광의 약 99.8%를 흡수한다고 주장한다.5
제조사의 사용법도 흥미롭다.
BLACK 4.0은 얇고 고르게 칠해야 한다. 너무 두껍게 바르면 회색처럼 보일 수 있고, 위에 투명한 바니시나 수지를 덮으면 광택이 생겨 효과가 약해진다.
제조사의 설명과 사용 지침을 보면 이 페인트의 성능은 안료의 흡수뿐 아니라 마른 도막의 초무광 표면을 유지하는 데에도 좌우된다.
Vantablack과 BLACK 4.0은 눈으로 보면 비슷한 목표를 향한다. 물체에서 돌아오는 빛을 줄여 아주 깊은 검정을 만든다.
방법은 전혀 다르다.
Vantablack은 미세한 구조 속으로 빛을 끌어들여 빠져나오기 어렵게 했다. BLACK 시리즈는 아크릴 페인트라는 조건 안에서 안료, 바인더, 무광 첨가제와 마른 표면의 반사를 조절했다.
이 차이는 셈플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세운 대전제에서 비롯됐다. 이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다.
“누구나(아니시 카푸어를 제외한) 구입해 특별한 장비 없이 직접 붓으로 칠할 수 있어야 한다.”
200만 달러짜리 다이아몬드를 지우다
논쟁에는 몇 년 뒤 흥미로운 후일담이 생겼다.
2019년 MIT가 당시 기록적인 초흑색 탄소나노튜브 표면을 발표하자, MIT에서 활동하던 예술가 디무트 스트레베(Diemut Strebe)는 연구팀과 함께 16.78캐럿짜리 천연 노란 다이아몬드를 그 물질로 덮었다.
추정 가치는 약 200만 달러였다. 작품은 뉴욕증권거래소에 전시됐다.
다이아몬드와 탄소나노튜브는 모두 탄소로 이루어지지만 원자 배열과 구조가 달라 광학적 성질은 크게 다르다.
검은 탄소나노튜브로 덮인 다이아몬드는 반짝임과 입체감이 사라져 작은 검은 구멍처럼 보였다.
작품 제목은 〈The Redemption of Vanity〉, ‘허영의 구원’이었다.
스트레베와 MIT 연구팀은 한 가지를 더 밝혔다. 이 초흑색 공정을 특정 예술가에게 독점시키지 않고 원하는 예술가에게 개방하겠다는 것이었다.6
다만 숫자는 여전히 남는다.
Vantablack에는 99.965%라는 수치가 붙어 있고, BLACK 4.0은 제조사가 한 제품 설명에서 약 99.8%를 주장한다. Musou Black 같은 다른 초흑색 페인트에도 각자의 숫자가 있다.
그렇다면 99.965가 99.8보다 반드시 더 검은 것일까.
그 질문에 답하려면 숫자보다 먼저, 어떤 빛을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측정했는지를 봐야 한다.
2부에서 계속
각주
1. 초기 Vantablack의 99.965% 흡수율과 수직 정렬 탄소나노튜브 구조는 Surrey NanoSystems의 공식 자료를 확인했다. S-VIS가 정렬되지 않은 CNT 구조와 광학 공동을 사용하며 분사 방식으로 적용되지만 일반 페인트처럼 판매되는 제품은 아니라는 설명은 Ben Jensen 인터뷰를 참고했다. Surrey NanoSystems · WIRED
2. 2016년 Surrey NanoSystems는 아니시 카푸어에게 Vantablack S-VIS를 “creative arts”에서 사용할 세계 독점권을 부여했으며 다른 분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한 명의 예술가와만 협업할 여력이 있었고 카푸어를 선택했다는 설명과 “색이 아니라 기술을 허가했다”는 Ben Jensen의 발언은 WIRED 취재에 근거한다. Business Standard/PTI · WIRED
3. Pinkest Pink 판매와 카푸어의 가운데손가락 사진, BLACK 1.0 개발 뒤 검은 안료와 Superbase를 각각 1,000개씩 예술가들에게 보내 피드백을 받은 과정, 실리카 무광재의 한계와 화장품용 투명 무광재를 활용한 BLACK 2.0 개발은 WIRED의 Adam Rogers 취재를 근거로 했다. WIRED
4. BLACK 3.0의 나노 크기 세라믹 미세구형 입자 기반 맞춤형 검은 안료와 고안료 함량을 위한 아크릴 고분자 설명은 개발자 Stuart Semple의 2019년 인터뷰를 근거로 했다. 독립적인 조성 분석이나 동료심사 논문이 아니라 개발자의 설명이라는 한계가 있다. The Naked Scientists
5. BLACK 4.0의 검은 안료·아크릴 바인더·무광 첨가제와 99.8% 흡수율은 제조사 Culture Hustle의 제품 설명에 따른 주장이다. 현재 FAQ는 “99% 이상”이라고 표현한다. 얇은 도포와 무광 표면 유지에 관한 지침도 제조사 자료를 확인했다. 99.8%는 Vantablack과 동일한 파장·각도·장비 조건의 독립 비교시험으로 검증된 값이 아니다. Culture Hustle 제품 설명 · FAQ
6. 〈The Redemption of Vanity〉는 Diemut Strebe와 Brian Wardle의 MIT 연구팀이 16.78캐럿 천연 노란 다이아몬드(추정가 약 200만 달러)를 CNT 초흑색으로 덮어 2019년 뉴욕증권거래소에 전시한 작품이다. MIT는 다이아몬드와 CNT가 같은 원소인 탄소이지만 구조가 달라 상반된 광학적 외관을 보인다고 설명하며, 연구팀은 해당 공정을 원하는 예술가에게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MIT AeroAstro · MIT CAST